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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에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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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의회 의회에바란다 입니다.
이곳은 의회의 기능에 맞는 자치법령의 제도개선사항, 또는 의원들의 의정활동과 관련된 다양한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곳입니다. 게시하여 주신 소중한 의견에 대하여는 귀중한 의정활동 자료로 활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시민불편 사항의 대부분은 시관계 부서에서 처리해야만 해야 할 민원으로 답변을 원하는 민원에 대하여는 창원시청 홈페이지(http://www.changwon.go.kr)를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본메뉴는 본인확인을 하셔야 글이 게재됩니다.

창원시의회에서 창원NC파크 명칭 통과 조례안을 보면서... 구** 2019-02-16 0

시의회 의원 여러분들... 욕 먹고 있는 것은 알고 있죠?

지명에서 마산이 어떻게 나왔는지 그 근원은 아는지요?

창원이란 지명이 만들어진 것이 조선 시대입니다. 경상도지리지에는 조선 태종 8년[1408년]에 의창(義昌)현과 회원(會原)현을 합쳐 창원(昌原)부이라 이름 지었고요. 그리고 부(府)로 승격되었다가 뒤에 태종 15년(1415년) 행정구역이 정비되면서 도호부(都護府)가 되었습니다. 창원부가 되면서 합포에 우도 병마절도사영(右道兵馬節度使營)이 설치되기도 하였고, 1601년(선조 34)에 대도호부로 승격되었네요.

창원도호부의 중심이었던 창원시 의창구 북동, 중동, 소답동 일대의 도호부 거리와 객사문, 관아, 창원읍성 등 옛모습은 일제강점기와 산업화에 따른 도시개발에 밀려 거의 대부분 사라졌네요.

하지만 창원부에 1899년 마산포(합포)의 개항과 함께 세관이 설치되었는데, 개항장 각국 공동조계의 획정에 의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파견된 부산 세관장 스카글리오티(A. Scagliotti →러시아인?)가 조계에 관한 일을 마친 후에 "창원감리서 별관에 부산세관 마산출장소를 개설"하였습니다.

1910년,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일본은 10월 1일에 소위 조선총독부령 제7호(앞으로 부령으로 약칭함)로 부ㆍ군의 명칭과 관할구역을 새로이 정하면서 '창원부'를 '마산부'로 개칭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1914년 마산부의 영역을 개항장(합포구 일대 항구 주변) 일대로 축소(주로 일본인 거주)시키고 잔여지역을 창원군으로 다시 분리시켰네요.

왜 그랬을까요?

아래의 내용은 " https://namu.wiki/w/%EC%9D%BC%EC%A0%9C%EA%B0%95%EC%A0%90%EA%B8%B0"에서 일제강점기 때의 일본의 한반도 정책의 내용을 퍼온 것입니다.

『3.2. 1910년대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을 위해 대한제국의 대표로 참석한 이완용과 일본 측의 대표로 온 데라우치가 협상에 임했다. 이는 각국의 국왕이 마주보며 날인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어려웠고 일본측에서 대리인을 보냈는데 대한제국은 황제가 직접 대면하는 것이 의전상으로도 맞지 않았다. 일제는 이 과정에서 성립된 한일합방조약을 공표하여 대한제국이 다스리던 모든 영토를 식민지로 편입하고, 옛 대한제국 황실은 이왕가(李王家)로 격하시켜 일본 황실에 편입시켰다.

조선인들은 일본내지에 주거할 시에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참정권 행사 형태는 현재의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와 흡사하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와 같은 정치활동,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같은것은 보장받지 못하였다.조선총독부의 지배를 받는 한반도에서는 조선인 중 극소수의 지주들과 친일파들만 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에 들어가 정치적 의사를 피력할 수 있었다. 또한 구한말의 태형 규정을 폐지하지 않고 존속시킨 뒤, 재정의 30~40%를 헌병 경찰제도에 투입하고, 헌병과 경찰의 즉결처분권으로 이용하여 민중의 삶을 폭압적으로 규제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다. 다만 특이하게도, 1920년대 하라 내각은 내지연장주의에 근거하여 조선총독부 관할 영토인 조선 내에서도 조선인에게 1등 신민과 동일한 권리를 보장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내각이 2000~3000만이라는 적지않은 수의 조선인들이 내각을 지지하도록 하여 군부와 조선총독부를 확실하게 견제할 수 있도록 하려던 시도로 엿보여진다.

당시 한반도는 일본 열도에 비해 천연자원이 상대적으로 풍부했고, 비록 구매력은 볼품 없었다고 하나 대신, 노동력 또한 값싸고 풍부했다. 일제가 이러한 특성에 주목해서 1900~1910년대에 쌀, 면화, 양잠, 소에 대한 품종 개량 및 육성과 SOC 건설을 통해, 조선을 일본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식량, 원료의 공급기지이자, 상품판매시장으로서 재편하고자 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 밖의 이유로는 조선의 관세 자주권 박탈에 따른 이득, 경쟁자로 맞붙을 수 있는 조선으로부터 일본 국내 산업 보호(회사령, 광업령, 어업령 등), 러시아 등 대국에 대한 방어기제, 식민지화(이민정책) 등이 꼽힌다.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한 게, 허수열 교수의 <일제하 조선에 있어서 일본인 토지소유규모>(2012)에서는 1935 추계 기준 일본인 소유 논 면적은 조선 전체의 15%이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할 것은 총독부가 가지고 있는 국유지는 상당한 규모였다. 또한 일본인의 조선 이민은 황수환 교수의 <근대기 일본인 이주농촌의 형성과 이주농촌가옥 - 강서구 대저지역을 중심으로>(2011)에 따르면 일본인의 조선 이민 수요는 1911년부터 시작되어 1927년까지 증가하고 있었다. 이는 대규모는 아닐지라도 총독부가 이민정책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

위 내용을 보니깐 일제강점기 때에 한국인들은 일본 내지에 주거할 시에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군요. 슬픈 일인 것은 알죠?

그 뒤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치루면서 병참해군기지가 필요함에 따라 진동면, 진전면, 진북면 지역의 옛지명인 진해(바다를 진압하다)의 명칭을 웅천현(현 창원시 진해구) 대용의 명칭으로 사용하면서 '진해'로 분리시켰습니다.

창원이 마산과 진해를 집어삼킨 것이 아니고, 조선총독부와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창원지역이 창원, 마산, 진해로 따로 분리되었는데, 다시 하나의 창원시로 합쳐진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인의 성씨만 창씨개명을 당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지역명도 일제에 의해 창씨개명 당하듯 바뀌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의 지명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가자는 의미에서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원'처럼 바뀐 지명이 많은데 대표적인 것 몇 개만 추려봐도..
함경도 덕원은 원산으로, 전라도 옥구는 군산으로, 경남 동래는 부산(부유할 부, 뫼 산)포가 일본인들에 의해 부산(가마 부, 뫼 산)포로 바뀌면서 현재의 지명이 부산(가마 부, 뫼 산)이 되었네요.

두척산으로 불렸던 산은 무학산으로, 반룡산으로 불렸던 산은 팔용산으로 일본인들이 불렀고...

왜 새구장 명칭에 있어서 대다수의 NC다이노스 팬과 구단에서 원하는 명칭을 애써 무시하는지요? 일반 창원시민의 생각은 또 어떠할까요? 합포구, 회원구, 진해구, 의창구, 성산구의 주민들이 창원시 깃발 아래에 모여도 시원찮을 판에, 그러면서 도청소재지인 창원시를 중심으로 타시군 경상도 야구팬들도 끌어모아야할 처지에... 경상도에도 경쟁팀 많습니다. 대구 삼성, 부산 롯데 등등...

그리고 NC다이노스 프로야구팀은 (통합)창원시에서 새로운 야구 역사를 만들어가야할 개체이지... 왜 예전의 마산고와 마산상고를 위시한 아마야구의 역사를 NC다이노스팀이 쓸 신축구장에 '마산야구'란 명칭으로 감정이입을 하는지요? 그리고 프로야구 출범 후에는 많은 야구팬들이 마산구장하면 "부산롯데자이언츠 마산구장"을 떠올리는 형편인데...

시의회에서 새로 정한 구장명이 해괴망측하다는 것은 그나마 좀 배웠다는 시의원분들이 더 잘 알테죠? ㅋ

다른 지자체장이나 시의원들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기업을 모실려고 하고, 정책 주도의 사업을 따올려고 골머리를 쓰면서 애쓴다고 하는데,,, 돈을 쓰는 사람들을 모으고자 문화, 역사 및 관광 자원을 보존하고 개발한다고 하는데, 창원시는 개발 논리만 앞세워서 있는 문화, 역사 및 관광 자원도 다 버리더군요. 한가지 예로 대표적인 것이 창원읍성. 창원에 오면 형편없이 볼 것 없다는 것은 스스로 알고 있죠? 그리고 도청소재지인 창원에 지역대학교 소속의 의과대학이 없는 것도 알테고요.

우리 창원시 의원분들은 얼마나 배가 부른가 또 다른 형태의 "예송논쟁"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나보네요.


그리고 사족을 붙히자면 우리 창원 지역의 야구 발원 역사에 있어서...

최초의 야구팀에 관한 기록은 창신중·고등학교에서 발간한 ‘창신 90년사’에 수록돼 있다. 1908년 호주출신 선교사 아담슨(A. Adamson)이 창신학교를 설립한 뒤 1914년에 야구부와 축구부를 창단했다는 내용이다. 1911년 교사로 부임한 국학자 안확(1886~1946) 선생도 야구부 창단에 힘을 보탰다. 당시 안확 선생은 “방안에 앉아서 책만 읽다가 나라를 잃어버렸으니…우리는 문(文)도 해야 하지만 무(武)도 닦아야 하겠다. 곧 건강한 신체가 나라를 되찾는 원동력이 되니…” 라고 설파했다.

(출처 : 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096330(%B0%E6%B3%B2%BD%C5%B9%AE)

를 많이 인용하면서 주장하더군요. 왜 국학자이자 민족주의자인 안확 선생을 비롯하여 그들이 학교명을 지을 때 창원학교라 못 했을까요? 그러면서 왜 마산학교라고 안 했을까요? 한 번 생각을 해봤는지요?

그 후에 1939년 7월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되었다가, 광복 후 1948년 5월 재단법인 경남노회 기독교교육학원이 설립되어 6년제 창신중학교로 재개교하였고, 1951년 12월 학제 개편에 따라 창신중학교와 창신농업고등학교로 분리되었네요.

지명을 대하는 관점도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해줬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