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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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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보 282호/3.25] 창원대도호부사 백선남(白善男)의 선정과 충절 백태현 2022-03-25 585

[시보 282호/3.25] 창원대도호부사 백선남(白善男)의 선정과 충절1

 창원은 1408(조선 태종8) 의창(義昌)과 회원(檜原)이 합하여 창원부, 1415(태종15) 창원도호부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오랫동안 부성(府城)을 유지하면서 병사 겸 부사인 김응서와 군관민이 함께 힘을 모아 안골포 등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크게 승리하였다. 이때 왜구에게 항복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하여 1601(선조34) 창원을 대도호부로 승격시켰고, 창원이 충의의 고을로 이름이 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창원대도호부의 읍성은 현재, 창원시 의창구 의창동 일대였다.

 

백선남(白善男) 부사는 1581(선조14) 김제에서 출생, 11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일찍이 무예를 숙련하였고 22세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공은 평소 전쟁에 이길 수 있는 길은 무비(武備)와 병법(兵法)을 연구, 실전(實戰)하는 길임을 깊이 새기며 실천하였다.

전라좌수사로 재임시 많은 군기와 군량을 잘 비축한 공으로 인조 임금으로부터 준마(駿馬)를 수여 받았으며, 1636(인조 14) 2월 제47대 창원대도호부사에 부임하여 청백리(淸白吏)로 칭송받았다.

그 때가 정묘호란이 있은 지 9년이 되는 해였다.

공은 부임 초부터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해 권박, 황시헌 등 전 향리에 군사훈련을 가르쳐 수백 명의 정병을 양성하였다.

 

같은 해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전쟁에서 승리하면 살아 돌아올 것이요, 전쟁에서 패하면 나라를 위해 힘껏 싸우다 명예롭게 죽는 것이 무관된 의무다라는 결심으로 근왕병(창원 ,김해) 500여명을 인솔하여 인조왕이 몽진한 남한산성을 향해 출병하였다. 남한산성에 이르는 길목인 광주까지 달려갔지만 적병이 이미 교통을 차단한 상태였다. 이에 쌍령에서 적과 전투를 벌이며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기마병을 앞세운 청나라 군사 6천여 명의 야간 기습으로 1637(인조15)13일 전군이 순절하였다.

 

1637(인조15)823일 병조참판(2)에 증직되어 운용비(雲龍碑)를 하사받았고, 창원대도호부에서 청정비(大都護府使白候善男淸政碑)를 세웠다. (현재 창원시 용지공원 내에 보존) 그 후 1813(순조13) 윤여임(尹汝任)과 함께 정려를 내려 충신지문(忠臣之門)이라 하였다.

 

2022113일 특례시로 승격된 창원시는 대도호부의 위상을 421년 만에 다시 되찾은 셈이다. 앞으로 무한한 성장을 이룰 창원의 미래를 생각할 때, 오늘을 사는 우리는 지나간 역사를 기억하고 문화와 전통을 계승 발전해 나가야 한다.

창원시가 나라사랑과 향토사랑의 본고장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백선남(白善男)을 비롯해 우리 고장을 빛낸 충신열사들의 업적을 기리고 되새기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